내가 교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12년 EBS에서 방영된 “세계의 교육현장 - 행복을 가르치는 숲 속의 학교 산티니케탄”을 보고 나서였다. 산티니케탄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라는 인도의 시인이 세운 학교로 처음엔 자기 자녀를 위한 작은 홈스쿨링 형태였지만 조금씩 규모가 커져 지금은 초, 중, 고등학교를 포함해 대학과 대학원까지 있는 큰 학교가 되었다. 학교 수업의 대부분은 나무 그늘에서 이루어지는데 나무 한 그루가 하나의 교실로,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다른 나무로 이동한다. 자연의 교실이 주는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에서 평화로운 느낌을 받는다.
산티니케탄은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을 비롯한 4명의 노벨상 수상자들, 인도 전 총리 인디라 간디, 물리학자 샤텐드라 나스 보스, 그리고 세계적인 석학과 영화감독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타고르의 후손인 슈프리오 타고르는 “건강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사람은 사회에 훨씬 잘 적응할 수 있으며 자연 속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오히려 훨씬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산티니케탄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이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 아이의 가능성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믿었던 타고르의 신념이 100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은 어떠할까?
한국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이는 2009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6년 연속 최하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또한, 한국 청소년들의 사망원인 중 1위가 자살이다. 교육을 받는 목적은 행복한 삶을 위함인데 입시 위주의 교육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현재의 행복하지 못함이 미래에도 행복할 수 없다는 건 청소년 행복지수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 평균 행복 지수마저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라는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행복을 모른다면 미래에도 행복을 모른다는 얘기다.
행복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행복인지 알 수 있다. 만일 행복을 배우지 못한다면 행복한 상황에 있어도 그것이 행복인지 모를 수 있고, 자칫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행복을 배운다면 평생 행복만 쫓다가 끝낼 수도 있다. 행복은 주관적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때로는 쾌락, 또는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행복의 한 부분일 뿐 진정한 행복이라 말할 수 없다. 행복은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행복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기쁨, 즐거움, 편안함, 평화로움, 따뜻함, 사랑받는 느낌, 인정받는 느낌, 성취감, 만족감 등 긍정적인 부분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꿈을 향한 과정에서 겪는 노력의 고통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의미가 매우 포괄적이라고 한다는 것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상황도 매우 많다는 얘기다. 그러나 행복의 의미가 성공과 결합하여 그 위치가 달라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성공 역시 행복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이다. 꿈이 다양한 만큼 성공도 다양하다. 작은 일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까지 성공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모든 종류의 성공에는 그 나름의 성취감이 있다. 따라서 작은 성공이라도 그 성취감에 따른 행복은 늘 뒤따라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행복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만족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비교하는 습관이 생기면서 성취감도 줄어들고 행복도 점차 사라지게 된다.
학생들은 각자 나름대로 잘하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것은 아주 드물다. 모든 것을 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누군가 나보다 잘하는 것이 있으면 손뼉 쳐주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그 사람이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다양성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성적에 기준을 두기 때문이다.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목은 아무리 잘해 봤자 인정받지 못한다.
한때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푹 빠져 생활하던 후배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이라 집에서는 물론이요 주변에서도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그 후배는 결국 프로게이머가 되었고 지금은 게임을 만드는 프로그래머로 살고 있다. 만일 그 후배가 주변의 만류로 게임을 접고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면 오히려 행복했을까? 모두가 가는 길이 곧 행복의 길은 아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가야만 하는 길, 가고 있는 길, 가고 싶은 길이다. 가장 행복한 삶은 세 가지가 맞아 떨어지는 삶이겠지만, 그러나 두 가지만 맞아도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바로 가고 있는 길과 가고 싶은 길이다. 그러나 많은 학생이 부모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야만 하는 길로 가고 있다. 사실 그 길은 꼭 가야만 하는 길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가야만 하는 길은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길이 아닐까?
행복을 위한 또 하나의 요소는 목적의식이다. 언젠가 TV에 연세가 90이 넘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는데, 연세가 90이 넘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밭일을 나가시면서 싱글벙글하신다. 이유를 물으니 농사진 돈을 모아 마을 회관을 짓는 게 꿈이라고 하신다. 보통 그 연세엔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사는 노인이 태반인데, 90이 넘은 연세에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 싱글벙글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제 더는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 청소년들이 꿈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에 “요즘 다들 그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게 오히려 더 놀라운 이야기일 수 있겠다. 꿈이 없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지금의 교육은 ‘일단 대학에는 가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잘하는 게 있어도, 좋아하는 게 있어도, 자기만의 꿈이 있어도 한마디로 ‘닥치고 공부’하란 셈이다.
어른 중에 꿈을 이뤘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현실적인 어려움과 능력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로 보면 꿈을 ‘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한 학생이 있는데 고민해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과 능력 부족으로 의사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왜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누군가를 돕는 것’을 할 수 있는 직업이 정말 많고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학생은 NGO에 들어가기로 했고 의사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었던 ‘남을 돕는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꿈은 ‘하고 싶은 것’이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만일 꿈이 ‘되고 싶은 것’이라면 이 학생은 꿈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이 ‘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 학생은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면 그 하위로 무수히 많은 ‘되고 싶은 것’들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바로 꿈을 이룬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학생들이 목적의식을 갖게 하는 것은 행복을 위한 교육의 중요한 과제다. ‘닥치고 공부’하는 것보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공부할 때 더 많은 기쁨과 희열, 그리고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대개 현재와 관련되어 있다. 목적지에 닿아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앤드류 매튜스)